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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바람 설계 승효상, 조선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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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위해 '죽은 자들의 도시' 짓는 건축가
조선일보 2015.12.05 03:04


경기도 廣州에 '유골의 벽' 설계한 승효상 이로재 대표

"집, 조금 불편해야… 편리함에 물들면 삶이 부패해요"


묘지 꺼림칙? 산 자 위한 공간

조선시대까진 뒷산에 조상묘… 죽음을 매개로 삶을 성찰했다

우리 삶속으로 다시 찾아와야


낮 최고기온 8.5도. 무덤 속 망자(亡者)들도 기지개를 켤 만큼 온화한 겨울날이었다. 지난달 30일 경기 광주시 시안가족추모공원. 고도 150m의 야산에 도시가 구축되고 있었다. 1만8800㎡(약 5710평) 부지, 높이와 길이가 제각각인 180개의 벽(壁)들이 세워지는 중이다. 노란빛을 띤 콘크리트 담장에 가로 50㎝ 세로 30㎝ 깊이 35㎝짜리 흑회색 대리석 함이 오와 열을 맞추어 박혀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대리석 표면이 따뜻했다. 유골을 봉안한 담이라 해서 '봉안담'이라 불리는 야외 납골당으로 전체 1만 기 규모다. 담 각각의 높이는 1.7~2.7m, 길이도 6~24m로 제각각이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짓고 있습니다."


내년 1월 완공 예정인 설계 책임자 건축가 승효상(63)이 말했다. 제멋대로 흩어진 백발, 푸른빛 도는 회색 머플러를 무심한 듯 맵시 있게 두르고,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읽을 때면 동그란 검정 테 안경을 벗고 눈을 찡그렸다.



"죽음을 기억하라"


승효상은 국내 건축계에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수근문화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등 굵직한 건축상을 받았다. 지난 2002년엔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개인전을 가졌다. 2008년 베네치아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를 거쳐 2011년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으로 활약했고, 지난해 서울시 총괄건축가 제1호로 선임돼 활동 중이다. 묘지 설계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墓域)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  왜 묘지 설계인가. 산 사람 집 지어달라는 의뢰만 해도 넘칠 텐데.


"도시가 지속되려면 번잡한 곳과 경건한 곳이 공존해야 한다. 경건한 곳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죽은 자의 거처와 성소(聖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부동산 바람이 불면서 묘역을 혐오 시설이라며 도시 바깥으로 쫓아버린 지 오래다. 나는 묘역을 우리 삶 속으로 되찾아 오자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 왔다."


―  묘지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뒷산에 조상묘가 있었다. 묘역을 죽은 사람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죽은 자의 육체와 혼(魂)은 소멸하고 영(靈)은 천국이라든가 하는 다른 곳으로 간다. 묘역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죽은 자가 묻혔다는 기억만 있는 거다. 결국 묘역은 산 자를 위한 공간이다. 기억 장치다. 죽음을 매개로 우리 삶을 성찰하는 곳이다."


그가 짓고 있는 이 묘역의 이름은 '천(千)의 바람'. 미국 인디언 사이에서 전승되던 시(詩) '천 개의 바람이 되어'에서 모티프를 따 왔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위로하는 이 시의 핵심 구절은 이렇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승효상은 시의 이미지를 구체화해 묘역을 구상했다. 묘역의 구심점이 되는 사유의 탑이 대표적인 예다. 높이 12m, 내부 공간 6.6㎡(2평) 이 탑엔 지붕이 없다. 뚫린 지붕으로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새가 되고 별빛이 된 죽은 자를 산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승효상은 "탑 한가운데에 화로를 놓아 유골 안치를 마친 유족들이 망자의 유품을 태우도록 할 생각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떻게 이별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했다.


 ―  묘역 입구엔 물이 흐르는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선 명계(冥界·죽은 뒤에 가는 영혼의 세계) 앞에 망각의 강이 흐른다. 거기서 착안했다. 그 공간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망각의 강과 외길을 통과하면 죽은 자들이 안치된 벽들이 눈앞에 펼쳐질 거다.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리고 돌아서면 산 사람들의 세계인 시내(市內)가 보일 것이다. 이 묘지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동시에 생각하게끔 하는 매개가 되었으면 한다."


―  스웨덴 스톡홀름의 우드랜드 공동묘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렇다. 인공의 언덕 위에 열두 그루 느릅나무가 서 있고, 길 끝에 있는 교회까지 걸어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묘역을 한 바퀴 돌면 산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느끼게 된다. 아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 곳곳의 무덤 기행을 해 왔다. 여러 묘역을 둘러보면서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삶을 겸허하게 쳐다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묘역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 건축 요체는 '貧者의 미학'"


승효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빈자(貧者)의 미학'이다. 승효상 건축의 요체이자 정신이다. 1992년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4·3 그룹 전시회에서 그가 "내 화두로 평생 삼겠다"고 선언해 유명해진 말이다. 1996년 출간한 책 '빈자의 미학'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이 묘역에 유골을 모시는 데 드는 비용은 기당 985만~1185만원 선. 영구 사용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빈자'와는 거리가 있다.


―  '빈자의 미학'이란 대체 뭔가.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의 미학이다. 가진 게 많더라도 절제하면서 검박하게 살자는 것이다. 건축은 개인이 돈을 내어 짓는 것이지만, 개인 소유는 아니다. 건축주는 건축에 대한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에 있다. 옆집 사람들도 그 집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건축이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는 공공성이다."


―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은 말인가.


"대학(서울대 건축과) 졸업 후 15년간 '공간(空間)'의 설립자 고(故) 김수근 선생 문하에 있었다. 김수근 선생은 내게 최대의 적(敵)이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시니 넘어야 할 대상이 없어졌다. 이제 '김수근 건축'이 아닌 '승효상 건축'을 해야 하는데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방황했다. 우연히 서울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가다가 골목길을 보면서 굉장히 놀랐다. 남루하지만 그 남루함만 걷어내면 무척 근사한 공간이었다. 달동네 골목길이란 공동체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공공성이 익어가는 공간이다. 달동네 사람들은 가진 게 많지 않기 때문에 나누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건축의 지혜와 지식이 거기에 다 있었다."


―  달동네가 낯설지 않던가.


"어릴 때 부산 서대신동 피란민촌에 살았다. 서울 달동네 풍경이 그곳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익숙하고 잘 아는 공간이라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뭔가가 보였던 거다. 이 달동네 골목을 매개로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빈자의 건축'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건축가한테 의뢰를 못 한다. '가난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아이디어다.


"그런 비판도 많이 받았다. '잘사는 사람더러 가난한 사람 코스프레하라는 거냐'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돈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같이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거다. 개인의 집을 짓더라도 사회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자는 거다. 재개발한답시고 아파트를 세워서 원래 터의 구조를 바꾸고 원주민들의 삶을 지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진 자의 횡포'다. 설계를 하더라도 공익을 위해서 하자는 이야기였다."


"랜드마크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승효상이 '공간'에서 독립해 자기 사무소를 연 게 1989년. 26년간 100여 채의 집을 지었다. 건축비평가 이주연씨는 승효상에 대해 "다작(多作)은 아니지만 작품에 진지함이 있고 튼튼하게 만들며 자기 정신을 담는다"고 평했다.


―  당신의 대표작은.


"없다. 다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 있다. 내 이름을 걸고 처음 한 작품이자,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1992년 지은 서울 논현동 '수졸당(守拙堂)'이다."


―  어떤 집이길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아버지 퇴직금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려고 지은 집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노랫말처럼 서양집을 흉내 내 마당에 잔디 깔고 지은 미니 2층 집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담을 치고 담 위에 유리병 조각을 꽂아놓아 옆집과 모여 살지 못하고 붙어 살게 됐다. 그 때문에 우리의 거주 풍경이 흉악해졌다. 나는 전통적인 공간 개념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231㎡(약 70평)의 작은 땅이지만 마당을 세 개 만들어서 네 개의 방이 마당을 품을 수 있도록 했다. 방의 규모는 작지만 공간감이 풍부해졌다. 분명 양옥인데, 정신만은 한옥이다. 지금 보면 미흡한 면이 많지만 내 건축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던 집이다."


―  설계비는 많이 받았나.


"유 전 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출간하기 전이라 돈이 없었다. 설계비 대신 '이로재(履露齋)'라고 적힌 200년 된 현판을 가져가라고 하더라. '이로재'란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가난한 선비가 문안을 드리며 '새벽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 현판을 받아와서 사무실 이름도 '이로재'로 바꿨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현판 감정가가 꽤 비싸서 설계비 두 배쯤 된다."


수졸당은 1998년 건축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잘 지은 주거용 건물'로 꼽히기도 했다. 승효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건물들은 대개 주거용이다. 경기도 남양주의 '수백당(守白堂)'(1998), 경기도 광주의 '퇴촌주택'(2009) 등이 그렇다.


―  유명세에 비해 건축 규모가 작다.


"맞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없다. 국가 발주 시스템을 비난했다.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공사) 방식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근처에도 안 갔다."


―  랜드마크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내 일상에서 소중한 건 우리집 앞 골목길과 커피숍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도시 진실'이란 일상적 공간에 있지 상징적 모뉴멘트에 있는 건 아니다. 모뉴멘트란 도시 경영자들이 자기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 다 중요하다. 그와 무관한 랜드마크는 더 이상 만들지 말자, 기왕 있는 것이라면 그걸 연계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말하는 거다."


―  그래도 건축가로서 랜드마크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있을 텐데?


"추호도 없다. 건축은 기억장치다. 예를 들어 작은 문학관을 만든다고 해도 그 건물로 인해 내가 기억될 거다. 나는 내가 그렇게 기억된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다. 건축이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하나의 설계도를 만들 때도 무수한 시행착오가 반복된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결과가 건축물로 남아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참을 수가 없다."


"언어는 나의 감옥"


달변의 사내였다. 논리는 정교해 보였고 어휘는 격조 있었으며 어조는 단호했다. 승효상은 "말 잘한다는 이야기가 싫다. 어릴 때는 더듬었다. 말보다 생각의 속도가 빠르니 더듬게 되는 거다. 이제는 말을 하면서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라고 했다.


―  랜드마크를 짓지 않아도 유명해졌다.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하면서 건축보다 생각이 먼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건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도망 못 가도록 먼저 선언해 놓고, 그걸 지키지 못하면 부끄러우니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게 내게 울타리이고 진리다. 그 안에서만 놀면 자유롭지만 거기서 벗어나면 불안한 거다. 그래서 내게 언어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말을 먼저 만든다. 그 말이 내게 감시의 눈으로, 비수(匕首)로 온다."


―  '빈자의 미학'은 당신 건축에서 어떻게 구현되나.


"첫째로 단순하자는 거다. 건축은 배경일 뿐이고 사는 사람이 고쳐나가자는 거다. 또 하나는 비우는 거다. 공간을 비워서 사는 사람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준다. 다른 하나는 조금 불편한 거다. 한 집에서도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나가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게 한다든가 하는 거다."


―  집이 왜 굳이 불편해야 하나.


"불편한 게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능주의가 20세기 전반부에 지나치게 영향을 준 데 대한 반발이다. 동선을 짧게 하고 효율적인 것만 중시하다 보니 인간의 미묘한 감정이 도외시되더라. 편리한 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침잠하면 결국 우리 삶이 부패해질 거다.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데 불편함은 좋은 약이다. 수도자가 왜 수도하러 험한 길을 떠나겠나. 스스로를 일깨울 것이라 믿고 떠나겠지."


―  건축가의 철학이 지나치게 굳건하면 건축주와 갈등도 있을 텐데.


"건축가가 건축주에게만 봉사하면 시녀나 하수인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의 이익과 건축주의 이익이 반목할 때, 건축가는 사회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 건축가는 굶을 수 있는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건축주에게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 해서 건축주가 떠난 적도 여러 번 있다. 나는 얼마든지 굶을 자신이 있다. 떠났다 돌아오는 건축주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겐 밤을 새워서라도 봉사한다."


―  당신은 어떤 집에서 사나.


"서울 동숭동의 내 건축사무소인 이로재 옥탑방에서 산다. 5층짜리 건물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아흔셋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계단을 오르내리시니 지금도 새벽 기도를 가실 정도로 건강하다."


도무지 타협이란 게 없는 사람이었다. 인터뷰 답변은 '그렇다' '아니다' '싫다' 같은 선언으로 점철되었다. 스승 김수근의 유작인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단호함이 극에 달했다. 이 건물은 지난 2013년 '공간'의 부도로 공매에 나왔으나 유찰됐고, 김창일 아라리오갤러리 회장이 사들여 미술관으로 개축했다. 승효상은 "우리 건축의 자존심이자 우리 문화의 성지(聖地)인 공간사옥을 건축박물관으로 만들어 보전해야 한다"며 민간에 넘겨지는 것을 반대했었다.


―  그래도 미술관이 되었으니 다행 아닌가.


"차악(次惡)이다. 공공의 영역에 있어야 영원하다. 미술관이 돼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난 안 가봐서 모르겠다. '(민간에 넘겨지면) 영원히 안 갈 거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안 갔다."


그와 동향(同鄕)인 기자가 그 화법의 익숙함을 문득 감지하고 "그 직설화법, 경남 출신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물었을 때야 이 철옹성 같은 건축가는 비로소 멋쩍게 웃으며 "그런 게 있지요. '치아뿌라, 마' 하는 거죠" 했다. 영락없는 '부산 싸나이'였다.

(재)시안

시간마저 잠이 드는 영원한 안식처